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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통과 문화를 이어 삶이 된 그곳, 영주

2025-05-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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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통과 문화를 이어 삶이 된 그곳, 영주
'외나무다리 건너 무섬마을'

   그동안 수많은 다리를 만났다. 별생각 없이 건넌 다리가 있는가 하면, 늙은 호박 같은 노오란 노을을 바라보며 황홀감에 취했던 다리도 있다. 기억 저편에 잠자고 있는 다리만 연결해도 책 한 권은 너끈히 나올 테다. 사람들은 영주 무섬마을 외나무다리를 우리나라에서 가장 아름답다고 한다. 150m 정도 길게 이어진 유려한 곡선미는 감탄을 자아낸다. 하지만 그 다리의 진미는 보이지 않는 데 있다. 다리를 오가며 평생을 보낸 삶의 애환이 그것이다.

 


 
마을을 잇다, 삶을 잇다, 외나무다리 건너 무섬마을
   국가민속문화유산 영주 무섬마을은 국가민속문화유산 안동 하회마을과 예천 회룡포마을 같은 ‘물돌이 마을’이다. 마을을 휘감는 물길은 태백산과 소백산에서 각각 흘러온 내성천과 서천이다. 천 너머 강둑에 서서 마을을 바라보면 마치 ‘물 위에 뜬 섬’처럼 보인다. 이 마을을 ‘수도리(水島里)’라 부르는 이유다. 우리말로 ‘무섬’이라 부른다.

 
무섬마을을 대표하는 상직적인 구조물, 외나무다리



   마을에 들려면 다리를 건너야 한다. 지금은 대부분 차가 오가는 수도교를 이용하지만 1979년 이전까지만 하더라도 외나무다리가 마을과 사람을 이어주는 유일한 길이었다. 황순원의 『소나기』에 등장하는 징검다리가 풋풋한 어린 사랑을 이어준다면, 이곳 외나무다리는 수백 년간 이어 온 전통과 삶의 애환을 이어준 통로였다. 마을 사람들은 말한다. “외나무다리로 꽃가마 타고 시집왔다가 죽으면 그 다리로 상여가 나갔다”라고. 그러니 이 다리는 숨통이나 진배없다.

 
01. 만죽재 고택에서 즐기는 차경 
02. ‘ㅁ’ 자형 뜰집으로 원형이 잘 보존되어 있는 해우당 고택
03. 차가 오갈 수 있는 수도교가 있지만 많은 관광객이 꼭 외나무다리를 이용한다



   무섬마을에 사람이 살기 시작한 것은 1666년(현종 7)부터다. 처음 터를 잡은 이는 반남박씨 박수 선생이다. 그 이후 박수 선생의 증손 사위 김대가 1757년(영조 33)에 처가 마을인 이곳에 들어오면서 반남박씨와 선성김씨의 집성촌으로 발전했다. 마을이 한창 번성할 무렵인 구한말에는 120여 가구에 주민 500여 명이 살았지만 현재는 50여 가구에 50여 명의 주민이 살고 있다.
   입향조인 박수 선생은 마을 개척과 함께 국가민속문화유산 영주 만죽재 고택을 지었다. 만죽재는 앞쪽에 ‘ㅡ’ 자 모양의 사랑채, 뒤쪽에 ‘ㄷ’ 자 모양의 안채가 자리해 중앙에 안마당이 있는 반듯한 ‘ㅁ’ 자 모양을 하고 있다. 이것은 유교의 생활 원리를 가옥 구조에 반영하여 남녀의 공간을 엄격히 구분한 것이다. 만죽재 뒤편 섬계초당에 올라 방문을 활짝 열면 고즈넉한 마을과 길고 느린 내성천이 한눈에 내려다보인다.
   수도교 앞에는 국가민속문화유산 영주 해우당 고택이 자리한다. 입향조 김대의 손자인 김영각이 1800년대 초반에 건립한 고택이다. 한 차례 크게 수리한 적이 있으나 지금까지 그 원형이 잘 보존되어 있다. 사랑채에 걸린 현판은 흥선대원군이 친구인 김영각의 아들 김낙풍에게 써준 것으로 전한다. 고택의 구조는 만죽재와 같은 가옥 가운데 뜰이 있는 ‘ㅁ’ 자형 뜰집이다. 마을에는 그 외에도 김덕진·김뢰진·김규진·김정규·박덕우·박천립 가옥 등 7점이 경상북도 민속문화유산 또는 문화유산자료로 지정돼 있다. 이들 고택은 격식을 갖춘 ‘ㅁ’ 자형 가옥을 비롯해 초가지붕 옆에 연기 배출구가 있는 까치구멍집 등 다양한 전통 주거 양식을 보여준다.
   이런 무섬마을을 둘러보고 나면 신경림 시인이 꿈에 본 다리를 시로 노래했던 것이 떠오른다.
   “다리가 되는 꿈을 꾸는 날이 있다 / 스스로 다리가 되어 / 많은 사람들이 내 등을 타고 어깨를 밟고 / 강을 건너는 꿈을 꾸는 날이 있다 / ……” - 「다리」 中
   시인이 꿈꾼 다리는 분명 작은 다리일 테다. 누구나 일상처럼 건너는 친숙한 다리 말이다. 그 다리는 항상 거기 있었지만, 우리는 소중함을 모른 채 건넜고, 다리 또한 무심한 사람과 공간을 묵묵히 서서 이어주었으리라. 무섬마을의 외나무다리처럼.

 
04. 부석사 무량수전에서 안양루를 바라보면 보이는 풍경   05. 노을 질 무렵의 부석사는 숙연함이 느껴진다


 
비대칭이 주는 안온함, 부석사
   무섬마을에서 40여 분을 달려 봉황산 기슭에 자리한 부석사에 이른다. 2018년 유네스코 세계유산 ‘산사, 한국의 산지 승원’에 등재된 천년고찰 부석사는 의상대사가 676년(신라 문무왕 16)에 왕명을 받아 창건했다고 전한다.
   주차장에서 일주문과 천왕문, 보물 영주 부석사 범종각, 보물 영주 부석사 안양루를 거쳐 국보 영주 부석사 무량수전까지 이르는 길은 400m가 조금 더 되는 거리다. 오르막길이지만 느릿느릿 걸어도 15분이면 충분하다. 가파른 길을 오를 때 깨닫는 게 있다. 부석사는 땅의 생김새에 따라 물이 흐르듯 가람을 배치해 자연미가 돋보인다는 것이다.

 
06. 부석사 전경



    부석사의 건축적 특징은 모든 건물이 일직선상에 놓이지 않고, 비켜서듯 어긋나 있는 동시에 비대칭 구조로 지어졌다는 점이다. 범종각과 안양루도 예외가 아니니 어긋나 앉아있을 수밖에. 하지만 안양루을 지나면 석등과 무량수전이 눈앞에 펼쳐지는데 이 둘은 대칭적 비례를 이뤄 조화를 완성한다. 무량수전 역시 가운데 편액을 중심으로 좌우에 기둥 3개도 대칭구조다. 힘찬 기운이 느껴지는 편액의 글씨는 고려 공민왕이 쓴 것이다.
   시선은 자연스럽게 편액에서 6개의 배흘림기둥으로 이어진다. 배흘림기둥은 기둥의 중심부가 위아래보다 굵은 항아리 모양의 기둥을 말한다. 기둥과 지붕이 맞닿은 곳에는 지붕 처마의 무게를 분산할 요량으로 공포를 주심포로 마감했다. 그 모습이 꽃대에 핀 한 송이 난꽃 같다. 최순우 작가의 『무량수전 배흘림기둥에 기대서서』를 떠올리며 부석사를 내려서니 머문 시간이 짧기만 하다.
선비문화의 원류, 영주 소수서원
   부지런히 차를 달려 유네스코 세계유산 영주 소수서원으로 향한다. 우리나라 최초의 사액서원으로 학문을 닦고 수양하는 뜻있는 선비 4,000여 명을 배출한 선비문화의 원류와 같은 곳이다. 30분이면 충분히 한 바퀴를 돌아볼 수 있지만, 그 속에 담긴 이야기와 철학적 의미를 살펴본다면 턱없이 부족하다.
   서원은 관학인 향교와 비슷해 보이지만 큰 차이점이 있다. 제향 대상이 공자와 그의 제자가 아닌 우리나라 선현인 점, 관립이 아닌 사립인 점, 설립 장소가 중심지가 아닌 산수가 빼어난 외진 곳인 점 등을 꼽을 수 있다. 영주 소수서원 역시 산수가 빼어난 외진 곳에 자리한 덕분에 조선 선조 때 심었다는 울창한 송림 ‘학자수(學者樹)’가 여행객을 품는다. 피톤치드 물씬한 상쾌한 공기에 가슴이 벅찰 노릇이다.

 
나날이 새로워지라는 뜻의 ‘일신재’는 당시 교사들의 집무실 겸 숙소였다



   영주 소수서원의 시작은 1542년(중종 37) 풍기군수 주세붕이 안향을 기리는 사당으로 세웠다가 유생들을 교육하며 ‘백문동서원’이라 명명하면서부터이다. 그 이후 1550년(명종 5)에 풍기군수로 부임한 이황의 요청으로 ‘소수서원’이라 사액 받고 최초의 사액서원이 되었다.
   출입문인 지도문을 들어서면 보물 영주 소수서원 강학당을 마주한다. 영주 소수서원에서 가장 규모가 큰 이 건물은 학문을 강론하던 곳이다. 내부에 명종이 쓴 편액이 걸려 있다. 강학당 옆에 제향 공간인 보물 영주 소수서원 문성공묘가 있다. 매년 3월과 9월에 안향을 주향으로 제향한다. 그 뒤로 유생들이 숙식하며 공부하던 일신재, 직방재가 있다. 영주 소수서원은 이처럼 형식에 얽매이지 않고 자유롭게 형편과 필요에 따라 건물을 배치했다. 모름지기 학문이란 자유분방함 속에 더 깊고 넓게 이어지는 법이니까.